어린 시절 살았던 골목길
나는 골목길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6식구는 춘천 중앙시장 골목길 바로 이 골목길로 이사왔습니다.
작은 골목길 단칸방에 6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습니다.
시장은 내 놀이터가 되었고 내 집이 되었고,내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골목엔 작은 수돗가가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론 우리 수돗물이었는데...
시장 사람 모두가 이용했습니다.
수돗물 사용료가 나오면 엄마가 시장 장사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물값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개똥이네는 많이 마시는것 봤으니 50원 내야한다 하면 ..
개똥이 엄마는 펄쩍뛰며 20원어치 밖에 안마셨으니 20원만 낸다고 해서
언제나 물값을 받을땐 울 엄마 신경이 곤두세워 졌습니다.
공동 화장실이 멀었기에 소변을 볼 일이 있으면 그냥 엉덩이 까고 하수구에다 눟고는 그냥 바가지로 물 한번 뿌렸습니다.
좋아하는 남자 아이가 지나가면 그래도 부끄러웠는지,
위에 입었던 웃도리를 밑으로 잡아당기고 엉덩이를 가렸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이 되면 연탄을 들여 놓는게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한번에 연탄을 많이 들여 놓으면 이제 이 겨울 따스하게 지낼수 있다며 안심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어느날 엄마가 그당시에 먹기가 쉽지 않던 불고기를 하셨습니다.
마땅이 요리 할 곳이 없어서 항상 지지고 끓이고 하는건 저 골목길에서 하셨던걸로 기억합니다.
석유곤로위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코닝 남비를 올리시곤 그위에다 요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고기만 먹으면 양이 작을것 같아 물을 부으셨는데 그만 그릇이 갈라지며
고기들이 바닥에 쏟아졌고,
엄마는 고기들을 주워 씻으시곤 다시 요리를 하셨습니다.
그래도 흔히 먹을수 있는 고기가 아니기에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에서 내려 오셨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습니다.
장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안보이시면 찾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시는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울 아버지 많이 외로우셨습니다.
비록 가족이 있었지만 돌아가실때까지 이북에 가족들을 그리워 하셨을테니 말입니다.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니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순간에 시간이 변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70년대로 돌아간 착각이 듭니다.
어딘가 문이 열리며 어린 시절의 제가 튀어나올것만 같습니다.
작은 단칸방에서 6식구가 산다는거 몸들은 작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을겁니다.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니 방 한칸 따로 얻어 나갔는데 어린 시절 그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 골목길 주점에서 맨날 막걸리 마시던 아버지가 미웠고,
커피 심부름 시키던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언니만 생일 파티 해줫던 엄마가 미웠습니다.
불만이 많았고 모든게 아쉬운 시절이었던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너무 너무 그리워 집니다.
비록 편리한 시설을 갖춘 부엌도 없었고,
작은 방에서 온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자야했고.
고기는 꿈 꿀수 없을정도로 귀했고,
비록 생일파티 한번 못해봤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 6식구가 살았을때가 너무나 그립습니다.
엄마의 보살핌이 너무나 따듯했고,
우리 형제들 어렸고,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니 더 그립습니다.
울 아버지 북한 출신 아버지 답게 엄하시고 말씀 한마디한마디가 투박하셨지만,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셨고,
누구보다도 자식들 교육에 열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막걸리도 따라 드리고 싶고,
맨날 인상 찡그리며 하던 커피 심부름도 웃으며 할수 있을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때는 철이 없어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 할수가 없었습니다.
고집이 쎄고 불만이 많았던 이렇게 생긴 아이가 저 골목안에 살고 있었습니다.